[영화]캔사스 시티 Kansas City, 1996
끄적끄적 2007/02/22 12:45
캔사스 시티 Kansas City, 1996
감독 : 로버트 알트먼
주연 : 제니퍼 제이슨 리, 미란다 리처드슨, 해리 벨라폰테, 마이클 머피, 더모트 멀로니
등급 : 18 상영시간 : 115분
FROM CINE21.com
영화를 보고 내가 끄적였던 감상문과 함께 KINO에 쓸만한 내용의 글이 있는 듯 싶어 저 밑에 고스란히 옮겨다 본다....PDF로 된 파일이 있다면 좋을텐데....원문 그대로 있으면 좋을텐데...살짝 읽어보니...소책자에 실렸던 바로 그 내용인듯 싶다.....글의 순서가 어찌되었든...내용이 어찌되었든...
more..1. 애벌레 <캔사스 시티> 영화 감상문
선거를하기 위해 줄서있는 사람들...
다른 지방에서 대리선거를 하기위해 온 사람들...
그들을 단속하려했던 공화당쪽 선관위원(?)...
그를 저지하는 민주당쪽 깡패(?)들...
미국은 개인이 총을 가지고 다닐수 있는 나라입니다...
깡패들이 선관위원을 총쏴서 죽입니다...
백주대낮에...그것도 선거판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제일 기억에 남는 장면이었습니다...
왜 그사람이 그자리에서 죽었어야했을까...
세상일이 모든게 그런거라면
바둥바둥 산다는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싶었습니다...
째즈 듣는걸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꼭봐야할 영화라 말해주고싶습니다...
째즈바에서 저들이 연주하는 한곡한곡 버릴것이없었습니다..
색스폰 둘이 번갈아 가면서 연주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한명은 나지막히...한명은 기교를 부리면서...
그러는 속에 질서가 있었습니다...
한명이 연주할때는 다른 한명은 가만히 있습니다...
연주가에 있어서 전쟁터와 같았을 그상황에서
그 두명은 룰을 짐키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선배에의해 만들어졌고 지금까지 지켜오고있는것들입니다.
마지막 장면 그녀가 다른 그녀를 죽일때
세상은 다시금 쳇바퀴 안으로 돌아오게됩니다...
그녀는 다른 그녀와 끝까지 함께 다닙니다...
도망갈 기회가 전혀없는 것도 아니었고
감독 역시 그런것들을 숨김없이 보여줍니다...
그녀는 다른 그녀가 자신을 죽이지 못함을 알고있었던걸까요..
결국은 그녀로 인하여 다른 그녀의 사랑은 끝을내게됩니다..
그녀는 이해할수없었던..하지만 부럽기만한
그녀는 그런 사랑을 소유할수없음을 알기때문입니다..
흑과 백이 갈라진 사회에서는 혼란이 없었습니다...
한쪽이 다른 한쪽을 지배하기만하면 될뿐
그런 세상에 맞추어 살아가면되었으니까요...
어느새 그런 질서가 깨지게됩니다...
서로 사이좋게 살아가는듯 보이지만
아직은 여기저기 차별의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그런 세상을 극복하면서 살아가고자하는 사람이 얼마나있었을지.
결국은 양지에서나 음지에서
저들 나름대로의 방식대로 살아나가게됩니다...
정답이 없는 세상에서
저들은 보이지않는 전투를 계속하고있습니다..
영화가 끝난후 자막이 올라가는 그시간.중저음의 콘트라베이스듀엣.
앞자리에서 대여섯명 정도 자리에서 일어나 밖에 나갑니다..
나머지 사람들은 음악이 끝나는 시간까지
그들의 자리에 파묻혀있습니다...
이런 영화 오래간만인거같네요...흠뻑 빠졌다는 느낌...
그렇게 재미있는 영화는 아닙니다...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때 어떤일이 있었나정도는
알고봐야할 영화같고요..(나역쉬 몰라요..^^;;;;)
푸른애벌레
981223:캔사스시티
more.. 2. KINO 1998.12.[ DOSSIER5 - 캔사스 시티 ] 모텐 스윙 (황덕호 재즈 컬럼니스트)
원문 : http://blog.naver.com/kino1995/60017453088
[ DOSSIER5 - 캔사스 시티 ]
모텐 스윙 (황덕호 재즈 컬럼니스트)
188 DOSSIER 5 <캔사스 시티> 공황기를 무대로 재즈와 유괴사건이 벌이는 잼 세션. 로버트 알트만의 새로운 걸작
▶캔사스 시티, 톰 펜더가스트로부터 재즈의 춘추전국 시대에 이르기까지 언젠가도 이 자리를 통해 이야기를 나눴지만 30년대 미국의 공황은 실로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의 혹독한 재앙이었고 오락산업의 붕괴였으며 곧 재즈에 대한 직격탄이었다. 많은 빅 밴드들이 오늘날에는 그 이름이 잊혀진 상업적인 스위트사운드 밴드로 돌변했고 도시 브라더스 오케스트라는 빙 크로스비를 앞세워 교묘한‘양다리 걸치기’작전(한쪽 다리는 스윙에, 한쪽 다리는 달콤한 스탠다드 팝에!)을 구사했다. 그러는 와중에 빅스 바이더벡은 31년 알콜 중독으로 세상을 떠났고 뉴욕 빅 밴드의 산실 플레처 헨더슨 오케스트라는 34년 해산했으며 그곳에 몸담고 있던 트롬보니스트 찰리 그린은 잡역부로 생계를 꾸리다가 36년 할렘가 길가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스스로가 재즈광이었던 로버트 알트만이 이루어낸 잼 세션과도 같은 영화 <캔사스 시티>는 한편으로는 1930년대 재즈의 메카였던 캔사스 시티에 대한 아주 흥미로운 보고서이다. 다른 도시와는 달리 공황기의 어두운 그림자는 찾아볼 수 없고, 지상에서는 열리는 화려한 정치집회와 함께 화려한 네온사인의 불빛 아래 지하에서는 흥겹고 역동적인 재즈 선율이 넘쳐 흐르던 이곳은 어떻게 모든 재즈 뮤지션들의 각축장이 되어왔으며, 이를 통해 재즈는 어떻게 새롭게 발전했을까?
▶ T e x t 황 덕 호 ( 재 즈 컬 럼 니 스 트 ) Moten Swing
Kansas City
Verve/ 529 554-2
니콜라스 페이튼, 제임스 졸라(이상 트럼펫), 올루 두라(코넷), 클락 게이튼, 커티스 포울크스(이상 트롬본), 돈 바이론(클라리넷 & 바리톤 색소폰), 제스 데이비스, 데이빗‘팻헤드’뉴만(이상 알토 색소폰), 조슈아 레드만, 크레이그 헨디(이상 테너 색소폰), 제임스 카터(테너 & 바리톤 색소폰), 마크 휘트필드, 러셀 말론(이상 기타), 제리 알렌, 사이러스 체스트넛(이상 피아노), 크리스찬 맥브라이드, 론 카터, 타이론 클락(이상 베이스), 빅터 루이스(드럼), 케빈 마호가니(보컬)
녹음연도: 1995년
30년대 캔사스 시티 사운드의 90년대식 부활. 78회전 싱글 속에서 여덟마디에 그쳤던 당시의 솔로들이 DNA화하여 오늘날 연주자들의 유전자와 결합이나한듯이, 당시를한번도경험한바없는젊은연주자들은당시잼세션을거침없이쏟아낸다. 무엇보다놀라운것은알트만자신의영화에서 보여줬던 화려한 캐스팅이 음악 분야에서도 어김없이 발휘되었다는 점이며 아울러 그 배치는 너무도 완벽하다. 레스터 영은 조슈아 레드만이, 콜맨호킨스는크레이그헨디가, 벤웹스터는제임스카터가, 그리고메리루 윌리암스는제리알렌이맡고있다. 얼마나절묘한가. 레스터영을제외하고는 이 모두가 명시적이지 않다는 점이, 그래서 하나씩 추측해야 한다는 점이 재즈팬들을 더욱 매료시킨다. 영화 장면에서 케빈 마호가니가 스탠드안쪽에서 노래부르는 광경은 정말 일품이다. 왜냐하면그가묘사한 조터너는 실재로 바텐더 겸 가수였으니까.
캔사스 시티 그럼에도 재즈는 발전하였다. 그것은 29년 공황이 오기 이전 이미 발동이 걸려 미친 듯이 앞을 향해 질주하던 재즈의 관성이었으며 그곳엔 루이 암스트롱, 얼 하인즈, 콜맨 호킨스와 같은 일급 연주자들이 탑승하고 있었다. 아울러 정작 자신은 그 열매를 따먹지 못했지만 플레처 헨더슨은 정교하게 짜여진 자신의 편곡악보를 지속적으로 만들어냄으로써 결국 베니 굿맨을 통해 그 과실이 만개하도록 만들었다. 결국 대공황이라는 엄청난 재앙 속에서도 재즈는 필연적으로 지나야 했던 향후 10년의 길을 끊임없이 달렸던 것이다.
하지만 그 시기에 스윙의 메카 뉴욕도 아닌, 저어-- 남서부 지방에서 향후 10년이 아닌, 15년 뒤에 만개할 품종이 이미 배태되고 있었다고 한다면당신은 믿을 수 있겠는가? 재즈를 단순한 배경음악으로 취급하지 않는, 그래서 그 역사에도 나름대로의 관심을 갖고 있는 당신은 이러한 주장에 어느정도 찬성할 수 있는가?
개봉 하느니 마느니, 엎치락 뒤치락 하다가 결국 3년만에 국내 공개되는 로버트 알트만의 95년 영화 <캔사스 시티>는 바로 이 사실에 대한 아주 흥미로운 보고서이다. 1934년 캔사스 시티의 희비극적 인질사건을 다룬 이 영화에서 우리는 같은 시기 뉴욕과 여타 도시를 휩쓸고 있던 어두운 공황의 그림자라고는 결코 발견할 수 없다. 화려한 정치 집회는 연일 계속되고 있으며 기차역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고, 밤거리는 네온 사인으로 번뜩인다. 그 네온 사인 불빛 아래 지하에서는 도박이 한창이다. 그리고 바로 그 윗층에서는 결코 다른 지역에서는 들을 수 없는 화끈하고도 역동적인 재즈가 밤새도록 울려 퍼진다.
주지하다시피 캔사스 시티가 30년대 이러한 호황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희대의 정계 막후인물 톰 펜더가스트 덕분이었다. 1902년 정치에 입문한 그가 부와 정치자금를 마련하기 위해 제일 처음 손을 댄 업종은 당대 연예, 도박, 매춘의 총집결체인 호텔이었다. 1907년 그가 문을 연 제퍼슨 호텔은 1920년까지 정치적 보호를 받으며 캔사스 시티 최고의 호텔로 성장했고 그는 이를 기반으로 이 지역의 상권을 하나,둘 집어 삼키기 시작한다. 범죄와 폭력을 기반으로 자신의 부를 축적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가리거나 정당화하는 힘을 가졌다는 의미에서 펜더가스트는 탐욕스런 자본가일 뿐만 아니라 교활한 정치가였다. 그로 인해 이 도시의 경기가 번창일로를 걷고 있는 상황에서 그는 오히려 시민들로부터 인기를 얻고 있었고 그 인기를 등에 업고 그는 캔사스 시티 12번가와 18번가를 가득 매우고 있던 사창가(뉴올리언즈 재즈의 고향인 스트로빌 거리에 비유될 수 있는)를 25년 강제 폐쇄한다. 일부 여성들과보수적인 여론은 이를 적극적으로 환영했고 이를 바탕으로 그는 1927년 이 도시의 완전한 지배자로 군림하게 된다. 하지만 그 거리들에 새롭게 들어선 것은 펜더가스트 손에 조정되는‘동일한 업종’의 산업들이었으며, 뉴올리언즈에서도 그랬듯이 캔사스 시티에서도 재즈는 그 틈바구니 속에서 왕성하게 자라난다. 무럭무럭, 튼튼하게.
펜더가스트의 또 다른 야욕은 교통 중심지로서의 캔사스 시티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로비를 통해 캔사스 시티를 중심으로 인근 도시를 연결하는 도로건설 계획을 현실화시켰고 이는 루즈벨트의 뉴딜 정책의 이념에 완벽히 부합하는 것이었다. 아니 조금 극단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뉴딜 정책은 조정자로서의 국가기능의 확대라는 측면에서 자유경쟁보다는 로비를 숭상하는 펜더가스트의 구미에 더욱 들어맞는 것이었다. 그리고 예외없이 그는 모든 도로건설 공사권을 독점적으로 취득했다. 한마디로 1930년대 미국 중부와 남서부의 모든 길은 캔사스 시티로 통했다. 돈 되는 것은 무엇이든지 캔사스 시티로 흘러 들었으며 또 캔사스 시티로부터 흘러나갔고 그러기에 재즈도 결코 예외가 아니었다. 바로 이점이 오늘 우리가 가장 흥미로이 여기는 부분이다.
이 점에 있어서 영화 <캔사스 시티> 중 먼저 유의 깊게 보아야 할 장면이 하나 있다. 바로 영화 전반부에 잠깐 등장하는‘헤이헤이 클럽’창문에 붙어있는 포스터로 여기엔“재즈의 전쟁 The Battle of Jazz”이란 헤드라인과‘레스터 영 vs 콜맨 호킨스’라는 부제가 쓰여 있다. 이 포스터가 말하듯 캔사스 시티는 모든 재즈 뮤지션들과 밴드들의 각축장이었다. 그것은 캔사스 시티를 애워싼 지역은 물론이고 영화 속의 포스터가 말해주듯 뉴욕의 거물들도 동참하는 자리였다. 그나마 솔리스트들끼리의 경합은 단순히 음악적이란 측면에서 다분히 우호적인 성격의 것이었다. 하지만 밴드간의 경쟁은 밴드의 생존이 걸린 피비린내 나는 일종의 혈투였다. 당시 남서부의 인기판도는 동부와는 달리 다분히 지역적인 성격을 갖고 있었다. 다시 말해 밥 블루멘탈이 지적한 것 처럼, 달라스에서는 알폰소 트렌트가, 오마하에는 로이드 헌터, 샌 안토니오에는 돈 앨버트와 트로이 플로이드, 오클라호마에는 월터 페이지의 블루 데블즈가 영주로서 군림하고 있었다. 그리고 캔사스 시티의 왕자는 역시 베니 모텐이었다.
문제는 남서부 지역의 노른자위인 캔사스 시티의 경제가 날로 번창일로를 걷자 이에 따라 폭증하는 자신의 유흥산업을 위해 이 도시가 주변 지역의 밴드들을 점차 끌어들였다는 점이다. 밴드마다 매우 안정적으로 확보하고 있던 자기 영역들은 매우 유동적인 것이 되어가고 있었으며 두개 이상의 밴드들이 하나의 관객 앞에서 순서대로 등장해 연주를 들려주는, 말그대로 진검승부와 같은 경연 속에서 밴드간의 주도권은 조석으로 바뀌게 되었다. 한마디로 캔사스시티라는 중원을 둘러싼 군웅할거, 춘추전국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물론 이것은 이 도시의 추악한 이권 싸움, 혹은 배신과 음모로 뒤범벅된 무협지를 연상케 하는, 재즈와는 어울리지 않는 피비린내 나는 혈투였지만 재즈팬으로서 돌이키건데 이처럼 흥미롭고 스릴 있는 시간과 공간은 재즈 역사상 결코 없었다. 단 하룻밤의 결투로 무대를 뺏고 빼앗기며, 밴드 리더가 하루 아침에 몇번이고 뒤바뀌는 일대 복마전. 혹시 재즈가 깨끗하고 산뜻한 음악이라고 여겼다면 착각은 물론이고 실망하지 말지어다. 이것이 바로 재즈니까. 담배연기, 위스키 그리고 캔사스 시티 특유의 바베큐, 랍스터 향이 땀냄새와 뒤범벅되어 클럽 안을 진동하고, 그 속에서 갱단 보스가 지불하는 급여를 받고 죽으라고 핏대세우며 연주하던 것이 바로 진짜 재즈였던 것이다.
(실제로 당시 캔사스 시티의 유명한 재즈클럽이었던‘옐로우 프로트 살롱’의 소유주는 갱단 두목 엘리스 버튼이었는데 그는 늘 현상수배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클럽은 날마다 문을 열었다. 이것이 당시 캔사스 시티다!). 그리고 그것은 영화 속의 셀덤 신(헤리 벨라폰테)의 대사처럼‘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할 정도로’지극히도 아름다운 음악이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재즈는 그 속에서 지속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어떤 독자는 이러한 질문을 가질 수도 있겠다. 그토록 캔사스 시티가 호황이었다면 왜 빅스 바이더벡이나 플레처 헨더슨은 그곳으로 진출하지 않았냐고. 만약 그랬다면 그들은 그토록 불행한 삶을 살지 않아도 됐을텐데. 하지만 그것은 어림없는 소리다. 왜냐하면 그 어떤 동부의 일급 밴드들도 쉽게 진입할 수 없는 캔사스 시티의 독특한 취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즉흥적이고 열띤 블루스이다. 아무리 세련된 솔로(빅스 바이더벡)나 정교한 편곡(플레처 헨더슨)을 가졌다 하더라도 투박하고 뜨거운 블루스 필링을 갖고 있지 못하면 그 밴드는 결코 남서부 지역에 발을 붙일 수 없었다(단지 맥키니즈 코튼 피커즈나 캡 캘로웨이 오케스트라 정도가 캔사스 시티에서 통할 수 있었는데 그들은 바로 이 지역의 블루스와 세인트 루이스 작곡가들의 작품을 그들의 레파토리로 대거 수용했기 때문이다). 이점이 바로 캔사스 시티 재즈의 매력이며 뉴욕의 밴드들이 감히 이 싸움에 끼어들지 못했던 이유이다.
KINO December 1998 195
Andy Kirk & Mary Lou Williams
Mary’s Idea
Decca/ GRD-622
앤디 커크 & 12 클라우즈 오브 조이: 헤리 로슨, 폴 킹, 얼 톰프슨, 클라렌스 트라이스, 헤롤드 베이커(이상 트럼펫), 테드 도넬리, 헨리 웰즈, 프레드 로빈슨(이상 트롬본), 얼 밀러(알토 색소폰), 루디 파웰(클라리넷 & 알토 색소폰), 존 헤링톤(클라리넷, 알토 & 바리톤 색소폰), 에드워드 인지(클라리넷 & 테너 색소폰), 존 윌리암스(알토 & 바리톤 색소폰), 딕 윌슨, 돈 바이어스(이상 테너 색소폰), 클로드 윌리암스(바이올린), 테드 브린슨, 플로이드 스미스(기타), 메리 루 윌리암스(피아노), 부커 콜린스(베이스), 벤 딕펜(드럼 & 보컬), 헤리 밀스, 파 테렐(이상 보컬), 메리 루 윌리암스 & 캔사스 시티 세븐: 헤롤드 베이커, 테드 도넬리, 에드워드 인지, 딕 윌슨, 메리 루 윌리암스, 부커 콜린스, 벤 딕펜.
녹음연도: 1936-1941년
텍사스의리더임을자처하던 테렌스T 홀더가단원들에게임금을주지않자, 결국단원들은쿠데타를감행했고밴드의운영권은앤디커크에게넘어갔다. 그는밴드명을12 클라우드오브조이로개명하고29년데카와레코딩계약을맺게된다. 하지만피아니스트였던마리온잭슨이사고로불참하게 되자 앤디는 새로 가입한 알토 색스 주자 존 윌리암스의 부인 메리를 임시로 불러 세운다. 당시 프로 뮤지션으로 활약하고 있지 않았던 그녀는 처음접하는곡을단숨에외워연주했으며즉석으로세련된편곡아이디어를제시했다. 그녀의편곡은이지역밴드에게서는결코볼수없는정교한맛이 있으며 그러면서도 독특한 블루스적 느낌을 결코 잊지 않는다. 베니 모텐 사후 이 밴드가 카운트 베이시보다 더욱 빠른 반응을 얻을 수 있었던 이유에대한생생한기록이바로여기에있다. 공황의 어두운 그림자와는 너무 거리가 먼 30년대의 캔사스 시티는 말 그대로 재즈의 메카였다.
▶캔사스 시티의 맹주 베니 모텐의 흥망성쇠 20년대 중반부터 약 10년간 캔사스 시티의 맹주는 역시 베니 모텐이었다. 1918년부터 트리오로 활동하다가 22년 6중주단을 거느리기 시작한 그는 당시 특출한 솔리스트들을 골라내는 혜안으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는 일찍이 오케이 레코드의 A&R 랄프 피어의 눈에 띄어 23년 녹음을 남길수 있었는데 랄프 피어가 25년 빅터로 옮김에 따라 모텐 역시 빅터로 이적해 전성기를 구가한다. 당시 모텐 악단의 짜임새는 동시대 플레처 헨더슨이나 듀크 엘링턴 오케스트라 정도에서만 들을 수 있는 수준의 것이었다.
이에 대항하는 인물로는 조지 E 리, 제스 스톤, 알폰소 트렌트, 테렌스 T 홀더가 있었다. 이들은 맨 처음 조지 리를 중심으로 모텐과 대항하기 위해 일종의‘통일전선’을 구축하는 양상을 띠었다. 즉 이들은 편곡과 밴드 결성 등에 있어서 서로 도움을 주고 받았던 것이다. 특히 제스 스톤과 알폰소 트렌트는 이 지역에서 최초로 편곡 악보를 사용하는 음악적 재능을 보임으로써 모텐의 강력한 라이벌로 떠올랐다. 제스 스톤은 색소포니스트 잭 워싱톤, 음역에 있어서는 루이 암스트롱을 능가한다는 평판을 얻었던 앨버트 힌튼을 발굴했고 알폰소 트렌트는 뛰어난 트롬본 주자 레오‘스너브’모즐리를 영입하여 달라스에 있는 아돌푸스 호텔 볼룸에서 한 무대에서 무려 열곡을 연주하는 계약을 맺음으로써 당시 흑/백 오케스트라의 모든 기록을 경신했다.
모텐은 음악 외에도 전략적으로 매우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들의 공격이 거세지자 모텐은 자신이 여전히 한 수 위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듯 (당시 남부 밴드가 동부에서 연주한다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었다) 28년 슬쩍 자리를 비켜 버팔로에 있는‘파라다이스 볼룸’에서 장기간 공연을 한것이다. 반(??) 모텐 진영은 허탈했을 것이다. 그러나 캔사스 시티라는 기름진‘중원’이 갑자기 장기간‘무주공산’이 되었고 그곳에 늘 진을 치고 있던 조지 리와 제스 스톤은 물론이고 달라스에 있던 테렌스 홀더와 알폰소 트렌스 역시 캔사스 시티로 뛰어 들었다. 그러나 복병은 전혀 예기치 못한 곳에 숨어 있었고 전세는 엉뚱한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미주리 주 태생의 베이스 주자 월터 페이지는 대학 졸업 후 1922년부터 3년간 빌리 킹 쇼 악단과 함께 남서부 일대를 투어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는 파산된 이팀을 인수하게 되었는데 그 때부터 주변에서 보이는 연주자들을 하나 둘씩 영입하기시작했다. 우선 왈코 시의 칼 머피즈 새티 스파이드 파이브에서 활약하던 알토 색소폰 주자 버스터 스미스, 오클라호마 주 에니드에서 진 코이와 활약하던 트롬본 주자 겸 편곡자 에디 더햄, 텍사스 주, 타일러에서 슈가 루즈 밴드에서 활약하던 트럼펫 주자 오란‘핫립스’페이지, 오클라호마시에서 아버지가 운영하는 햄버거 스탠드에서 노래하고 있었던 지미 러싱, 그리고 뉴욕에서 활약하던 곤젤 화이트 쇼 단원으로 캔사스 시티에 투어를 왔다가 팀이 해산되어 그곳에 남아 솔로 피아니스트로 활약하고 있던 뉴저지 출신의 빌 베이시. 일견 오합지졸의 외인구단. 그러나 3-40년대 빅 밴드를 즐기는 독자라면 이 이름들
196 KINO December 1998
Count Basie
The Complete Decca Recordings
Decca/ GRD-3-611
벅 클레이튼, 조 키이즈, 칼 스미스, 에드 루이스, 바비 무어, 칼 조지, 헤리 에디슨, 쉐드 콜린스 (이상 트럼펫), 조지 헌트, 덴 마이너, 베니 모튼, 딕키 웰즈(이상 트롬본), 에디 더햄(트롬본 & 기타), 레스터 영, 허쉘 에반스(클라리넷 & 테너 색소폰), 코우히 로버츠, 얼워렌(이상 알토 색소폰), 잭 워싱톤(알토 & 바리톤 색소폰), 추 베리(테너 색소폰), 클로드 윌리암스, 프레디 그린(이상 기타), 카운트 베이시(피아노), 월터 페이지(베이스), 조 존스(드럼), 지미 러싱, 헬렌 흄즈(이상 보컬)
녹음연도: 1937-1939년
수십장에 이르는 카운트 베이시 음반 중 단연 최고이다. 블루 데블즈부터 베니 모텐즈 캔사스 시티 오케스트라에 이르는 이 지역 재즈의핵심이결국여기에다모여있으며그것은역시박력넘치는리프와연주자들의자발성, 짙은블루스, 그리고포-비트리듬이주는 흥겨움이라할수있다. 비록시대적인제약이있긴하지만용광로처럼끓어오르는뜨거운스윙과소박하지만질펀하게풀어놓는즉흥 연주의 향연은 재즈가 주는 즐거움 그 자체이다. 베이시의 경쾌한 콤핑을 타고 흐르는 레스터 영의 유려한 멜로디와 허쉘 에반스의 투박한스타카토의대비는요즘연주자에게서는결코들을수없는순수한정서가숨어있다. 그것은여기저기에서뜯어낸모자이크수법으로는결코도달할수없는자기에자신에대한응시와음악그자체에대한탐닉에대한표상이다. 진정그시절은다시올수없는가.베니 모텐으로 대변되는 캔사스 시티 재즈는 이후 찰리 파커에 이르러 새로운 역사의 여명을 맞을 준비를 한다.
이 얼마나 화려한 것인지 금새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월터 페이지는 이 팀의 이름을 블루 데블즈라고 명명하고 오클라호마를 중심으로 점차 세를 얻고 있었다. 그리고 결국 모텐이 자리를 비운 캔사스시티에서 제스 스톤을, 미주리에서는 조지 리를 완파함으로써 블루 데블즈는 일약 중원의 고수로 떠오르게 된다. 누가 알았겠는가. 이 애송이 베이시스트에게 치명타를 맞으리라는 것을. 제스 스톤은 자신의 캔사스 시티 무대를 월터 페이지에게 빼앗기고 밴드를 해산했고 조지 리는 슬금슬금 동부에 일자리를 알아보러 떠나 영영 남서부로 돌아오지 못했다. 당연히 월터 페이지는 베니 모텐과 알폰소 트렌트와의 일전을 학수고대했다. 그러나 알폰소 트렌트는 조지 리의 방식대로 동부로 자리를 옮겼으며 캔사스 시티로 돌아온 베니 모텐은 늘 블루 데블즈를 피해 다녔다. 외관상 베니 모텐의 인기는 이 도시에서의 긴 공백에도 불구하고 건재했다. 그것은‘엘 토레온 볼룸’과‘페어리랜드 파크’에서의 출연계약을 통해여실히 증명되었다. 하지만 그는 블루 데블즈를 두려워 했다. 그는 몇 개월간 한 번도 월터 페이지와 한 무대에서 마주치는 일이 없이 교묘히 피해 다녔던 것이다. 하지만 28년 12월, 모텐의 캔사스 시티 오케스트라와 페이지의 블루 데블즈는 결국 파세오 홀에서 마주치게 된다. 무림 최고수 간의 결전. 그러나 결과는 싱거웠다. 블루 데블즈의 KO 승.
남서부에서 이들을 당할 자는 이제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거물 베니 모텐이 제스 스톤과 다른 점은 바로 패배 이후의 전략이었다. 그 멋진 승리에도 불구하고 블루 데블즈에게는 이렇다 할 출연 섭외가 들어오질 않았고(추측컨데 그것은 오랜 기간 지역 클럽 소유자들, 한 마디로 갱단과 돈독한 우애를 유지하고 있던 모텐의 로비 결과가 아니었을까?) 더욱이 밴드 경영에 서툴렀던 페이지는 악단의 재정을 날로 어렵게 만들고 있었다. 결코 블루 데블즈를 음악으로는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한 모텐은 페이지의 약점을 이용해 29년 블루 데블즈의 핵심인 두 편곡자, 빌 베이시와 에디 더햄을 자신의 밴드로 빼간다. 그리고 페이지에게 자신의 악단으로 들어와 자신의 이름 밑에서 실질적인 리더를 맡아 달라는, 꽤 매혹적인 제안을 건넨다. 당시 페이지는 이를 거절했지만 기울어가는 밴드의 제정은 어쩔 수가 없었다. 이후 핫립스 페이지와 지미 러싱도 모텐에게로 가고 결국 31년 월터 페이지는 잔여 멤버들에게 블루 데블즈를 넘긴 채 모텐 진영으로 투항하게 된다. 인생무상. 결국 무림의 승부도 무예로서 결판나는 것이 아니었으니 <소호강호>의 허무주의는 저 멀리 캔사스 시티에도 닿아 있었구나.
하지만 당시 블루 데블즈의 스타일은 30년대 환골탈태한 베니 모텐 오케스트라의 사운드를 통해 명백히 전달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야 말로 캔사스 시티 재즈의 이데아를 최초로 구현한 연주였다. 32년 빅터에서 남긴?토비 Toby?와?라파예타 Lafayetta?그리고?모텐의 스윙 Moten Swing?을 들어보자. 연주자의 자발성을 해치지 않는 편곡, 단순하지만 박력있는 리프(riff) 스타일, 4/4박자의 리듬 속에서 느껴지는 깊은 스윙감, 브라스와 리드(reed)의 완벽한 콘트라스트. 모텐이 누렸던 음악적 공적은 실제로는 모두 블루 데블즈로부터 온 것임은 자명하다.
▶베니 모텐 사후, 카운트 베이시를 경유하여 찰리 파커에로 펜더가스트의 캔사스 시티도, 베니 모텐 오케스트라도 결코 영원한 왕조는 아니었다. 프랭크린 드릭스는 펜더가스트의 지배력이 33년부터 약간씩 균열이 가고 있었다고 지적한 바 있는데 그 해 갱단이 유니온 스테이션에서 네명의 경찰을 살해한 사건은 시민들의 범죄조직에 대한 저항을 서서히 촉발시켰다. 그리고 이미 점차 밴드의 경영권을 놓고 있던 모텐은 35년 사소한 편도선 수술을 받는데 이 수술의 실패로 그는 수술대 위에서 허무하게 숨을 거둔다. 하지만 소문대로 모텐의 죽음이 곧 베이시에게로의 정권이양을 만들었던 것은 아니다. 밴드 해산 후, 36년 레노 클럽에서 새로운 9중주단이 결성되기까지, 빌 베이시는 줄곧 솔로 피아노 주자로 활약하고 있었는데 존 하몬드의 중재로 그가 토미 더글라스 밴드를 합병하면서부터 악단의 탄생은 본 궤도에 들어서게 된다(여기에는 드러머 조 존스가 있었다). 물론 핫립스 페이지와 버스터 스미스는 탈퇴했지만 라이오넬 헴프톤 밴드에 가입했던 벅 클레이튼과 허쉘 에반스가 돌아오면서 밴드는 13인조로 정비될 수 있었다. 모텐-리-스톤-트렌트-페이지로 이어지던 캔사스 시티의 혈투는 결국 빌 베이시라는 무명의 이방인을 위한 전주곡이었으며 그 무렵부터 그에게는‘카운트’라는 별칭이 따라 다니기 시작했다.
그 해 캔사스 시티에서의 선거는 알트만 영화가 묘사하듯 공공연한 부정선거였으며 연이어 펜더가스트의 뇌물사건은 미 정가 전체를 뒤흔들었다. 펜더가스트의 지배가 거의 막바지에 이르렀던 37년, 오클라호마 출신의 제이 맥샨은 캔사스 시티에 입성하면서 17세의 소년 찰리 파커를 맞이한다. 하지만 파커는 마치 들새처럼 뉴욕, 디트로이트 등지를 떠돌아 다녔고 결국 펜더가스트가 탈세혐의로 실형을 받게 된 이듬해인 40년이 되서야 캔사스 시티로 돌아 왔다. 이미 캔사스 시티는 이전과 같은 격전장이 아니었다. 하지만 마치‘광야 40일’을 겪은 예수처럼 찰리는 뭔가 다른 연주를 하기 시작했고, 또다시 캔사스 시티를 시작으로 새로운 역사의 여명이 어슴푸레 밝아 오고 있었던 것이다.
KINO
캔사스 시티는 팬더가스트에게 권력의 상징이었듯 재즈 뮤지션들에게는 진검승부지였다
Jay McShan Orchestra
Blues from Kansas City
Decca/ GRP16142
헤롤드 브루스, 올리버 마이너, 버나드 엔더슨, 데이브 미첼, 제스 존스, 윌리 쿡(이상 트럼펫), 밥 메릴(트럼펫 & 보컬), 조 베이어드, 로렌스엔더슨, 알론조 페티포드, 알폰소 푸크, 루디 모리슨 (트롬본), 찰리 파커, 존 잭슨, 루돌프 데니스(이상 알토 색소폰), 밥 메이벤, 헤리 퍼거슨,프레드 컬리버, 폴 퀴니쳇, 빌 굿슨(이상 테너 색소폰), 레이 브로들리(바리톤 색소폰), 레너드 에노이스(기타), 제이 맥샨(피아노), 진 레이미(베이스), 거스 존슨, 헤롤드 웨스트, 단 그레이브스(이상 드럼), 월터 브라운(보컬)
녹음연도: 1941-1943년
찰리파커는37년제이맥샨밴드에가입했다가그해홀로동부여행을감행하여3년뒤캔사스시티로돌아오는데그때맥샨밴드에재가입하여 남긴 녹음이다. 물론 여기서 이미 비밥의 단초가 보인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의 주제에 대한 해석은 확실히 모던한 느낌이 강하다. 한발만더앞으로내딛는다면마치멜로디는사라지고코드만이남을것만같은그런솔로이다. 같은알토주자존잭슨과비교해보면파커의성향은 분명하게 드러난다. 펜더가스트 시대와 무관하게 캔사스 시티가 낳은 독보적인 역사적 녹음이다. 그리고 그곳엔 결국 보다 근원적인 블루스만이남아있었다.
more..3.KINO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음악 (Interview ROBERT ALTMAN with MICHEAL HENRY)
원문 : http://blog.naver.com/kino1995/60017453082
[ DOSSIER5 - 캔사스 시티 ]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음악 (Interview ROBERT ALTMAN with MICHEAL HENRY)
188 DOSSIER 5 <캔사스 시티> 공황기를 무대로 재즈와 유괴사건이 벌이는 잼 세션. 로버트 알트만의 새로운 걸작
190 KINO December 1998
35년, 캔사스 시티. 도시는 부패한 정치인들과 결탁한 갱들이 지배하고 알콜과 재즈의 선율이 이곳을 채운다. 흑인 갱스터 대부에게 애인을 붙잡힌 전신교환원은 정치가의 아내를 유괴하고, 이 환각과도 같은 하룻밤의 다른 한켠에서는 레스터 영과 콜맨 호킨스의 색소폰 경연이 벌어진다. 그 어느 구석에 서 있는 어린 찰리 파커 위로 스스로를 겹치며, 자신의 기억 속으로 걸어들어간 로버트 알트만이 질문하는 스윙 재즈의 시간 또는 금주법 시대 캔사스 시티의 하룻밤.
>> <캔사스 시티>의 구상은 언제로 거슬러 올라갑니까?
내가 해롤드 핀터의 작품 "벙어리 웨이터 The dumb waiter"와 "방 The room"을 작업했던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때에 나와 프랭크 바히트는 한시간 짜리 TV용 영화의 시나리오를 썼다. 그것은 하룻밤 동안 도시를 돌아 다니는 두 여자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 프로젝트는 성사되지 않았고 시나리오는 여러 해 동안 트렁크 속에 쳐박혀 있었다. <숏 컷>을 찍을 무렵 그것에 대해 다시 생각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것을 되살렸고 우리는 캔사스 시티와 재즈의 세계 안에 그 이야기를 위치시켰다. 프랭크도 나처럼 캔사스 시티 출신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물론 그는 나보다 젊은 세대이다. 그의 아버지 회사였던 캘빈사에서 나는 종종 상업영화를 찍었다. 자료수집을 위해 그를 캔사스 시티로 보냈고 그는 신문에 작은 광고를 냈다. 덕분에 우리는 영화의 배경인 1934년 무렵의 생존자들 몇 명과 인터뷰할 수 있었다.
>> 당신의 이야기 안에 자전적인 인물이나 사건이 있습니까?
등장인물 모두는 실존 인물들을 토대로 하고 있다. 그 중에는 셀덤 신이라는 이름의 갱도 있었다. 그는 돈을 시가 상자 안에 넣어서 운반했고, 언제나 자신의 패거리들을 몰고 다녔다. 그는 98세라는 실로 엄청난 나이에 죽었다. 해리 벨라폰테 또한 할렘에서 은밀한 조직들을 거느린 갱이었던 그의 삼촌 레니를 모델로 삼았다. 애디 파커는 실제로 찰리 파커의 엄마였다. 그녀는 웨스턴 유니온사에서 일했고 작은 여관의 주인이었다. 영화 속에서 사회사업가의 이름은 네티인데 그것은 내 할머니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당시 나는 10살이었는데 내 주위 사람들 중에 자선사업을 하는 여러 부인들을 알고 있었다. 어떤 점에서 스틸튼이라는 인물은 내 아버지를 환기시킨다. 캐롤린에 대해 말하자면, 그녀는 당시의 내 친구들 중 한명의 엄마에게서 따온 것이다. 난 그 때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수 없었지만 그녀가 어딘가 특별하다고 느꼈다. 어쨌든 여기에는 내 자신의 개인적인 추억들이 적잖이 담겨 있다. 그것들은 상당히 낭만적으로 묘사되고 미화되었다.
>> 그 시기에 당신이 자주 갔었거나 만났던 클럽과 뮤지션들에 대해 자세히 기억합니까?
나는 15살 때부터 그곳에서 어슬렁거리기 시작했다. 그 때는 스윙 재즈가 막 시작될 무렵이었다. 나는 그것을 즐겼고 많은 시간을 그곳에서 보냈다.그곳에 모인 모든 사람들을 알고 있었고 그들은 나를 기쁘게 맞아주었다. 나는 거기서 줄리아 리, 베이비 로베트, 빌 놀란, 제이 맥쉐인과 그 때까지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곧 유명해졌던 많은 다른 사람들의음악을들을수있었다.
>> 30년대 캔사스 시티는 70년대의 라스베가스와같은역할을맡고있었던건가요? 그곳은 아메리칸 드림을 체험할 수있는신기루같은도시가아니었나요?
어느 정도는. 그곳은 지리적으로미국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다.동부에서 서부까지 어디를 가든지 캔사스 시티를 거쳐야만 했기 때문에 그곳은 기차의 정거장과 비행기들의 중간 경유지가 되었다. 뮤지션들에게 그곳은 교차로였다. 수많은 홍등가들이 있었고 술집들이 번창했으며 재즈맨에게도 매우 비싼 대가를 지불했다. 재즈 음악가들은 다른 어떤 곳에 출연하는것보다 캔사스 시티에서 두배 이상의 돈을 벌 수 있었다. 항상 일자리가 있었고 그래서 그들은 모두 캔사스 시티에 머물렀다. 바로 여기서 밴드가 결성되었고, 캘리포니아까지 서부 전역이라고 불리는‘지역’을 순회공연하곤 했다. 그리고 다시 캔사스 시티로 돌아오면 밴드는 해산되고 멤버들은 그곳에 정착하기 된다. 그 예가 바로 카운트 베이시이다. 베니 모튼이 죽은 후에 그는 블루 데블스란 이름으로 알려진 훌륭한 밴드를 물려받는다. 1935년 베니는 그의 친구가 집도한 편도선 절제 수술을 받던 중 동맥에 손상을 입어 요절했다.
>> 캔사스 시티의 클럽들은 어떤 식으로의 인종 차별도 없었습니까?
재즈 클럽에서는 없었다. 그 시대에는 모든 사람들이 그 곳을 이용했다. 백인들도 출입이 허락되었지만, 거기에 가는 숫자는 많지 않았다. 아이들은 가장 환영받는 존재였다. 극장들은 좀 달랐다. 흑인들은 발코니로 올라가야 했던 반면 백인들은 아무 곳이나 앉을 수 있었다. 캔사스 시티는 인종차별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자랑으로 내세웠지만, 미주리주도 다른 남부의 주들과 다를 것이 없었다. 그곳에는“자, 우리는 흑인들을 이렇게 잘 대해준다구”하는 식의 온정주의적 태도가 지배적이었다.
>> 정치적으로 캔사스 시티는 민주당의 텃밭이었나요?
당연하다. 보스 팬더가스트는 막후정치를 행했다. 그는 이탈리아인들이나 흑인들이 자신의 지역에서 행하는 것과 같은 방법을 사용했다. 그것은 완전히 부패한 조직이었다. 금주법 기간 동안에도 그들은 술광고를 그만두지 않았다. 법은 적용되지 않았고알콜은계속해서다량으로유통되고있었다.
>> 이탈리아인들과 흑인들이 도시를 양분하고 있었군요!
그렇다. 그들은 단지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정도였고 각각의 그룹들은 자기들만의 선호하는 무기가 있었다. 이탈리아인들은 모두 총을 지니고 있었던 반면, 흑인들은 칼로 만족해야 했다. 그것은 음악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노예 제도에서 풀려난 흑인들이 음악을 익혔던 것도 같은 식이었다. 악기 사용이 허락되지 않았던 그들은 탭댄스를 추는 방법을 배웠다. 그들은 자신만의 고유한 리듬을 창조해야 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 다른 미국의 대도시들에 비해 캔사스 시티의 흑인 인구비율이 더 높았습니까?
아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그런 사실들을 잘 알지 못했다. 거금이 걸린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아무도 거기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캔사스 시티에서 일어난 일은 남북전쟁 후에 할렘에서 일어난 것과 같은 것이다. 흑인들은 자신들의 고유한 공동체를 창조했다. 거기에서부터 시와 음악과 문학이 잠시 짧은 폭발 같은 활기를 띠었다. 흑인 사회에서도 흥미로운 일들이 많았지만, 그것들은 흑인 지역에만 국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주목받지 못했다. 흑인들은 그들이 입은 하녀의 유니폼을 벗어버렸다. 영화에서 미란다 리차드슨이 토마스 할벤튼에 대해 이야기한 일화는 사실이다. 벤튼은 흑인 하녀의 초상을 그리고 싶어했지만, 그녀는 유니폼을 입고 포즈 취하기를 거부했다.
>> 시나리오를 쓸 때 당신은 이미 재즈가 이 이야기에 가장 잘 맞는다고 확신했습니까?
아니다. 그 두 작업은 완전히 분리되어 행해졌다. 각본이 쓰여진 이후에 뮤지션들이 모여들었고, 곡들이 선정되었다. 내가 음악적인 리듬과 이야기의 분위기 사이에서 균형을 찾으려고 했던 것은 편집 과정에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듀크 엘링턴의 "Solitude"은 오래 전부터 사용하려고 마음먹은 유일한 곡이었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 블론디의 형집행에서 베이스 이중주로 처리한 것은 구두점을 찍기 위한 것이다.
>> 여기에는 놀라운 대위법의 효과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레스터 영과 콜맨호킨스의 색소폰 이중주 후에 택시 운전사인 블루의 암살이 뒤따르는 것과 같은. 우리는 행복감에서 공포로 넘어갑니다. 우리는 천상에 올랐다가 가장 비열한 현실로 추락합니다. 이런 대조가 구체화된 것도 편집에서인가요?
우리는 두 가지 경연장면을 촬영했다. 물론 그중에서 더 나은 것을 택했다. 그 장면이 어떤 부분에 삽입되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편집과정에서 그 장면의 적절한 위치를 즉시 찾아냈다. 5,6분 정도의 길이인 그것은 연기 사이의 휴식 같은 것이다. 그러나 나는 다른 어떤 장면보다도 택시 운전사를 찌르면서 웃고 있는 동안 해리 벨라폰테가 하는 끔찍한 인종주의적 농담이야말로 대위법적인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사람들이 그를 난자하고, 조롱한다는 것은 나에게 블론디는 흑인 보스 셀덤신의 손아귀에 있는 애인 조니를 구하기 위해 정치가의 아내 캐롤린을 유괴한다. 마치 이중주 색소폰 연주처럼 하룻밤동안 지속되는 두사건의 교차
충격적인 일이었다.
>> 어떻게 해리 벨라폰테를 캐스팅 했습니까? 그의 이상야릇한 모놀로그는 즉흥적인 것이었나요?
나는 처음부터 해리 벨라폰테를 생각했다. 대부분의 그의 대사는 그가 직접 썼다. 인종주의적인 농담도 포함해서. 그의 모든 모놀로그는 당시 실제로 이야기되었던 것들이다. 예를 들어 셀덤 신은 실제로 모든 흑인들을 다시 아프리카로 되돌려 보내고자‘검은 별’이라는 흑인 수송선까지 마련했던 흑인 정치가 마커스 가비를 비웃었다.그 이야기는 당시 가장 많이 오르내리던 화제거리의 하나였다. <아모스와 앤디>에서 그 전모가 다뤄졌고 그 이야기는 미국 전역을 휩쓸었다. <아모스와 앤디>는 모든 시대를 통틀어 가장 인기있는 라디오 쇼였다. 한동안 해리와 나는 <아모스와 앤디>에 대해 작업했고 영화에서 우리들의 대화와 연구가 구체화되었다.
>> 당신은 또한 <우리 같은 도둑들 Thieves Like Us>을 연상하지 않았나요? 이미 대공황을 언급하는데 있어 대위적 요소로 라디오를 사용했고, 특히 루즈벨트와 코플린 신부의 무미건조한 연설을 다루고 있는데요.
그것은 거의 같은 시기에 일어난 것들이다. <우리같은 도둑들>은 36년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캔사스 시티>는 34년을 배경으로 한다. 라디오는 중대한 현상이었다. 그것은 매스커뮤니케이션의 일대 사건이었다. 오락과 정치적 수사학은 라디오를 통해서 나오게 되었다. 그 시기에 대한 수많은 사전조사로 나는 그때가 별다르게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친숙하다. 그러나 <우리 같은 도둑들>에 대해 의식적으로 생각해본 적은 없다.
>> 블론디와 조니는 <우리 같은 도둑들>에서의 키치와 보위에 대한 도시적인 닮은 꼴이라고 여길 수 있을까요?
그렇지만 조니는 건달이고, 전형적으로 비도덕적인 인물이다. 그리고 블론디가 그에게 느끼는 열정은 병적인 것이다. 블론디는 조니의 아기를 갖지만 그가 아이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아이를 지워야만 했다. 그녀는 그를 위해 무슨 일이든 할 것이다. 반면 조니는 만약 셀덤 신이 그에게 그녀를 죽이라고 요구한다면, 주저하지 않고 그
녀를 죽일 것이다. 그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고 단지 이용할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결국 그녀에게서 희생자의 모습을 보게 된다. 그녀가 죽게 되었을 때, 그것은 살인이 아니라 하나의 자비의 행위이다.
>> 캐롤린이라는 인물은 굉장히 모호합니다. 미란다 리차드슨의 연기는 외양보다 더 계산적이고 더 자각적인 그녀의 성격을 부각시킵니다. 그녀는 제임스 하들리 체이스의 <미스 블란디쉬를 위한 난초의 걸음 Pas d’orchideespour Miss Blandish>에 나오는 납치된 상속녀를 연상시킵니다.
캐롤린은 자신의 세계에서 도망치기 위해 마약을사용한다. 완전히 벗어나기 위해서. 그렇다. 마치 밀러 부인처럼! 거기에서부터 마지막 카나리아의 이미지, 새장에 대한 아이디어가 생각났다. 그녀는 자신의 유괴자에게 연민을 느끼고 그녀를 이해한다. 하지만 그러한 감정은 특별하게 다루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감정, 영혼의 상태, 그리고 말로 표현될 수 없는 정서 수준에서 다루어질 뿐이다. 문자 그대로의 해석을 요구하기 보다는, 차라리 일종의... 재즈 같은 것이다. 마약 때문에 그 인물은 망상에 빠질 수 있고, 다양한 감정의 스펙트럼을 헤맬 수도 있다. 그녀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 일관성을 가질 필요가 없다. 처음에는 이 역할에 킴 베신저를 쓰려고 계획했다. 그녀가 나왔다면, 영화는 완전히 달랐을 것이다.
>> 미란다 리차드슨의 연기는 사회 계층의 경계를 강조합니다. 블론디는 사회적인 금기를 위반했습니다. 마치 조니가 인종적인 터부를 위반했듯이.
그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들의 울타리를 박차고 나왔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런 경험도 없기 때문에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모른다. 유괴에 대한 아이디어는 완전히 어리석은 것이지만 그것이 그시대에 유행이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적어도 린드버그 사건까지는. 왜냐하면 그 이후에 유괴자들에게 사형이 확정되었기 때문이다.
>> 당신의 인물들은 지나치게 영화를 많이 봅니다. 그들은 영화 속에 나온 인물들의 행동을 모방합니다.
블론디는 확실히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제니퍼 제이슨 리도 그러한 방법으로 연기했다. 블론디는 <추억 Platinum Blonde>이나 <폭탄 Bombshell>에서의 진 할로우를 보면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 지를 배운다. 그녀는 평생 손에 권총을 한번도 쥐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스크린에서 본 것을 모방한다. 그녀의 성격은 영화를 통해 형성되었다. 이런 일들은 어디에서나 흔히 일어난다. 영화나 범죄 소설에서 영향을 받지 않은 세상의 경찰을 내게 예를 들어 보라!
>> 재즈는 당신의 개인적 발전에 중요하게 작용했나요?
그렇다. 왜냐하면 나는 그것을 매우 일찍 접했기때문이다. 특별히"Solitude"를. 우리집에는 글렌도라라는 흑인 하녀가 있었다. 영화에서 찰리 파커가 자신의 어머니 집으로 돌아왔을 때, 인사하는 사람이 바로 그녀이다. 아마 내가 열한 살 정도 되었을 때일 것이다. 그녀는 나를 라디오 앞에 앉히고 이렇게 말했다.“ 잘 들어봐. 이것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음악이란다.”그것은 듀크 엘링턴이 연주하는"Solitude"였다. 나는 한 소절 한 소절을 모두 기억하고 있다. 그것이 스윙 재즈에 대한 내 첫번째 기억이다. 캔사스 시티는 그것의 중심이었다. 그리고 스윙 재즈가 전국에 널리 퍼진 것은 확실히 라디오 때문이었다. 오늘날엔 다행스럽게도 재즈가 새롭게 발전되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을 대체할만한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록큰롤도 죽었고, 랩도 죽었고 이제는 지독한 상실감만이 남았다. 젊은이들은 재즈를 다시 듣기 시작한다. 재즈 음반의 판매량은 상승중이다.
>> 재즈는 비순응주의를 초래합니다. 그것은 예술의 한 형태로서 소신을 필요로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소신을 갖는다. 블론디와 캐롤린. 유괴한 자와 유괴된 자 사이에는 이상한 공명과 애정이 흐른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하나로 만나지 못할 것이다는 것이 다른 사람의 감정을 해치는 것은 아니다. 재즈는 관중을 공동체적인 감동에 잠기게 한다. 그것은 당신으로 하여금 무언가를 공유할 수 있게 하는 예술이다.
>> 당신은 첫번째 영화 <비행소년들 The delinquents>의 첫 장면으로‘빌 놀란 오중주 마이너스 투’를 촬영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사실이다. 빌 놀란과 줄리아 리였다! 영화 전체는 캔사스 시티에서 촬영되었다. 나는 별로 그것을 기억하고 싶지 않다. 왜냐하면 유나이티드 아티스트가 나중에 내게 알리지도 않고 우스꽝스럽게 교훈적인 나레이션을 추가했기 때문이다.
>> 재즈는 1955년 캔사스 시티에서도 번성했나요?
줄리아 리는 여전히 클럽에서 연주하고 있었다. 베이비 로베트나 생존해 있는 다른 30년대 재즈 연주가들도 있었다. 많은 클럽들이 여전히‘블루데블스’나‘클라우즈 오브 조이’스타일의 빅 밴드를 가지고 있었다. 레스터 영은 고등학교로 연주하러 가곤 했었다. 그는 송년회에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이 작은 지방 도시에서는 통틀어 즐길 것이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주 하룻밤 연주를 위해 그들을 불렀다. 그 후에는, 모두들 음악가 연합이나 클럽으로 가서 밤새 즉흥연주를 하곤 했다.
>> 어린 찰리 파커는 잼 세션을 지켜봅니다. 그는 어린 로버트 알트만일 수도 있습니다. 아닌가요? 그는 미래의 자신의 작품에서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 이 음악의 영혼을 사로잡으려 하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아이들을 발코니로 내보내곤 했다. 나는 찰리 파커처럼 거기에 서 있었다. 나는 찰리의 캐릭터를 조금 더 발전시킬 것인가에 대해 신중하게 생각했다. 물론 나는 찰리가 연주하려고 일어섰을 때 조 존스가 그의 발치에 심벌즈를 던졌던 그 유명한 모욕 장면을 자연스럽게 떠올렸다. 그러나 나는 이 영화에서 버드의 개인적인 드라마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할 수는 없었다. 찰리의 아버지는 철도 승무원이었다. 그 당시 흑인으로서 가질 수 있는 가장 좋은 직업은 철도 차장이나 주방장이었다. 해리 벨라폰테의 아버지는 철도 요리사였다. 그래서 벨라폰테가 그처럼 훌륭한 요리를 할 수 있는 거다.
>> 촬영의 어떤 단계에서 당신은 잼 세션을 촬영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까?
촬영이 절반쯤 진행되었을 때, 나는 <숏 컷>의 음악을 맡았던 할 윌너를 불렀고 우리는 함께 가장 훌륭한 재즈맨, 매우 다양한 뮤지션들을 선택했다. 조슈아 레드맨과 크리스찬 맥브라이드를 제외하고 그들은 단 한 번도 함께 연주한 적이 없었다. 레드맨은 레스터 영으로 내정되었다. 콜먼 호킨스를 연기한 젊은이는 크레이그 핸디로 그는 찰리 밍거스와 함께 공연했다. 내게 그를 추천한 사람은 바로 밍거스의 미망인이었다. 그는 진정한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었다. 데이빗 머레이도 비슷하다. 그리고 제임스와 론 카터는 숙련가들이었고, 조 존스를 연기한 드러머 빅터 루이스도 그랬다. 게리 알렌은 메리 루 윌리암스를 연기하고 그녀의 스타일을 재창조하기 위해 정말 열심히 작업했다. 가장 놀라운 일은 그들 모두가 훌륭한 배우였고 자신의 인물들을 창조하고 필수불가결하게 만드는 데에 성공했다는 점이다. 그들 모두 연주 내내 마리화나를 피웠던 클라크 게이튼처럼 연기를 했다.
>> 당신은 음악가들이 즉흥연주를 하도록 그냥 내버려두었습니까?
사실 음악은 모두 정해져 있었던 것은 아니다. 몇번의 리허설이 있었지만, 카메라가 돌아가기 시작했을 때 겨우 편곡이 개략적으로 그려졌을 뿐이다. 나는 그것이 진짜 잼 세션이기를 바랐다. 라이브가아닌 음악은 하나도 없다. 모든 것은 그 클럽에서 녹음되었다. 나는 지금 막 부분적으로 해리 벨라폰테의 나레이션이 깔린 음악 다큐멘터리를 끝냈다. 여기에서 모든 것들을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제목은 <로버트 알트만의 재즈 34년, 캔사스 시티의 스윙 음악을 기억하며>이다.
>> 언제부터 편집자가 작업에 참여했나요?
첫번째 러쉬부터이다. 제랄딘 페로니는 정말로 대단하다. 그녀 없이 나는 어떻게 해나갈지 잘 모르겠다. 우리는 아주 빠른 속도로 편집했다. 영화는 매우 쉽게 형태를 갖추었고, 그것이 내게는 모든 것이 잘 되어간다는 신호였다. 편집에서 시간을 끌면, 나는 내가 해결하지 못한 문제들이 있기 때문이란 것을 알게 된다.
>> 당신의 이전 작품들에서 재즈는 드물게 나옵니다.
재즈를 영화에 사용하기는 쉽지 않다. 왜냐하면 재즈 자체가 너무 강하게 드러나서, 눈에 띄지 않고 그냥 넘어가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캔사스 시티>에서 재즈는 영화의 일부이기 때문에 아주 자연스럽게 자리잡았다. 이야기는 마치 한편의 재즈와 같이 구성된다. 나는 이 영화가 평면적이라기 보다는 입체적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의
구조는 무엇보다도 음악적이며, 줄거리는 매우 간결하다. 두 여자 사이의 대화는 내게 있어 재즈의 반복적인 선율을 환기시킨다. 그녀들은 자신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녀들은 오히려 무대를 퇴장해 색소폰을 불고 있는 연주자와 같다.
>> <숏 컷 2> 프로젝트는 어느 정도 진행되었습니까?
9월쯤 촬영에 들어가기를 희망한다. 기다리면서 우리는 시나리오를 재작업하고 있다. 새로운 인물들도 있지만, 릴리 톰슨이나 톰 웨이츠같이 이미 전편에 나왔던 사람들도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중 몇몇은 아주 잠깐 모습을 보일 것이다. 팀 로빈스나 제니퍼 제이슨 리는 아마도 지나쳐가는 모습 정도로만 나올 것이다. 애니 로스는 다른 클럽에서 술에 취해 노래를 부를 것이다. <숏 컷 2>가 들어가기 전에, 닉 놀테와 줄리 크리스티가 주연을 맡은 알란 루돌프의 새 프로젝트 <황혼녘 After Glow>을 위한 재정을 절대적으로 확보해야 한다. 그것이 지금 내게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 작가주의 영화에 있어, 상황은 <플레이어> 이후 헐리우드에서 그 추세가 점점 사라져가고 있는 느낌입니다.
더 이상 진정한 독립영화는 없다. 모든 것은 지나친 경쟁으로 숨막히게 하는 몇몇 복합기업에 의해 컨트롤된다. 그리고 거기에는 투기성 조작 이외에는 더 이상 아무 것도 없다. 이 모든 일은 전에 없이 심각한 것이다.
(1996년 3월1일 말리부에서 수집된 자료. 영어를 번역한 불어를 재번역한 것임)
POSITIF
그들은 서로를 이해하지만 그것을 넘어설 수는 없다. 그들은 분리된 계급이다.
1935년 캔사스 시티, 스윙 재즈의 선율 속에 마치 잼 세션과도 같이......
스틸컷 FROM CINE21.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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